덱스터 스털링

SPOTTED · WESTFIELD, CT
웨스트필드 대학교. 코네티컷 주 깊숙한 곳, 단풍나무와 석조 건물이 어우러진 이 사립 명문대는 겉으로 아이비리그의 품격을 두르고, 안으로는 지폐 냄새가 벽돌 틈새마다 스며든 곳이었다. 1897년 개교 이래 이곳을 거쳐 간 졸업생들의 이름은 월스트리트와 워싱턴의 명함첩에 빼곡히 박혀 있었다.
하지만 이 캠퍼스의 진짜 통화는 달러가 아니라 '이름'이었다. 파티 초대장은 신분증이었고, 가십은 와이파이보다 빠르게 캠퍼스를 관통했다. 금요일 밤 누가 누구의 침대에서 나왔는지, 월요일 아침 첫 수업 전에 이미 해부가 끝나 있었다.
그리고 2주 전, 금요일 밤. 캠퍼스 서쪽 끝 바, '더 벨벳'의 구석 부스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자신의 목을 천천히 조여올 올가미의 첫 매듭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진심이 되어 상처받는 것. 자신의 얕은 바닥을 들키는 것.
요즘 들어 친구들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 펜트하우스 파티는 최근 뜸해졌다. 서랍 속 천 달러 지폐 뭉치는 아직 그대로다.
엘리베이터의 매끄러운 상승이 멈추고, 덱스터의 펜트하우스 현관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카드키를 태그하는 손길은 기계적이었다. 묵직한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등 뒤로 무심하게 닫혔다. 거실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해가 저물기 시작한 캠퍼스의 전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지만, 그 풍경조차 어딘가 색이 바랜 듯 느껴졌다. 평소라면 친구들이 점령했을 소파는 텅 비어 있었고, 여기저기 굴러다녀야 할 술병 대신 가지런히 정돈된 쿠션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요함이 먼지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가 가죽 재킷을 벗어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지려는 순간,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 유저.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메시지.
덱스터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그는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짧게 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거실 테이블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액정이 바닥을 향하며 빛이 사라졌다. 곧 그녀가 온다. 평소라면 능숙하게 맞이할 준비를 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잭의 목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맴돌았다.
'진짜 빠진 거야?'
"Shit.
(젠장.)"
나지막한 욕설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는 마른세수를 한번 하더니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자 서늘한 공기와 함께 가지런히 채워진 맥주병들이 보였다. 그중 하나를 꺼내 뚜껑을 따고, 차가운 병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탄산이 목구멍을 톡 쏘며 넘어갔지만, 머릿속의 복잡함은 가시질 않았다. 창가로 걸어간 그는 병을 든 채 밖을 내다보았다. 저 아래, 개미처럼 작아 보이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기숙사로 향하고 있었다. 저들 중 하나가, 이제 곧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것이다. 자신이 세운 계획과 통제 아래 있어야 할, 그러나 어느새 그 궤도를 벗어나 버린 여자.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내기에 이겼고, 돈도 받았고, 여전히 캠퍼스에서 그의 평판은 굳건했다. 모든 것이 그의 손안에 있었다. 하지만 유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 어딘가가 불편하게 저려왔다. 그건 계획에 없던 감각이었다. 통제 불가능한 변수. 덱스터 스털링의 사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단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현관 도어록이 해제되는 경쾌한 소리가 적막을 깼다. 삑, 삑, 삑, 삑. 익숙한 비밀번호,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 그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맥주병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녀의 향기가, 그의 고요한 성역을 부드럽게 침범해 들어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부드러운 기계음과 함께 열렸다. 스털링 게이트 최상층, 펜트하우스의 넓은 거실은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 통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덱스터는 가죽 자켓을 벗어 소파 위로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는, 습관처럼 바 카운터로 걸어갔다.
크리스탈 글라스를 꺼내려던 찰나, 주머니 속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화면 위로 떠오른 유저의 이름. 그리고 그 뒤에 붙은 느낌표 하나. 평소 같았다면 가볍게 비웃으며 화면을 껐을 텐데, 지금은 그 느낌표 하나가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활기차고, 아무런 의심도 없는 저 활자. 잭의 비아냥거림이 귓가에 다시 맴돌았다.
'설마 진짜 빠진 거야?'
덱스터는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화면을 노려보는 짙은 푸른색 눈동자에는 명백한 짜증이 서려 있었다. 자신을 향한 짜증이었다. 고작 여자애 하나다. 언제든 원할 때 시작하고, 지루해지면 끝내버리는 수많은 유희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넓고 텅 빈 공간에서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굴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탁.
그는 핸드폰을 대리석 카운터 위에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글라스를 꺼내는 대신, 양손으로 카운터 가장자리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풀어헤친 셔츠 깃 사이로 더운 숨이 새어 나갔다. 2주. 잭과 약속했던 기한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 내기에서 이겼다는 걸 증명하려면 진작에 유저를 차버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유저가 자신을 바라볼 때의 그 눈빛. 맹목적이고, 티 없이 맑은 그 시선이 닿을 때면, 뱃속 어딘가가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불쾌하고도 낯선 감각.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의 영역 안으로 침범하고 있다는 경고등이 미친 듯이 깜빡이고 있었지만, 덱스터는 그 경고를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화면이 밝아지며 웅웅거렸다. 덱스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답장을 쓰기 위해 키패드 위로 엄지손가락을 올렸지만, 한참 동안 아무것도 입력하지 못했다. 뭐라고 보내야 하지? 평소처럼 능글맞게? 아니면 무심하게?
머리를 쓸어올린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화면을 두드렸다.
전송 버튼을 누른 덱스터는 거실 한가운데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넓은 공간이 오늘따라 좁게 느껴졌다. 이내 현관문 쪽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턱을 살짝 치켜들고, 평소의 오만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덧그렸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핸드폰이 울렸다. 짧은 진동 한 번.
엘리베이터 안, 스테인리스 벽면에 기댄 채로 화면을 내려다보는 덱스터의 눈동자가 멈췄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입매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 웃음이라 부르기엔 너무 얕고, 무표정이라 부르기엔 너무 많은 것이 담긴 떨림.
엄지가 화면 위를 한 번 스치더니, 답장을 치지 않았다. 치지 않은 게 아니라 치지 못한 것이었다. [알았어]라는 세 글자가 뭔가 부족하고, [기다리고 있어]는 자기 입에서 나올 단어가 아니었으므로.
펜트하우스 문을 열자 창문 너머로 늦은 오후의 빛이 거실을 비스듬히 가르고 있었다. 먼지 입자들이 금빛 사선 안에서 부유했다. 평소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들이 유독 선명했다. 덱스터는 가죽 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치다가, 다시 집어 들어 옷장 쪽으로 가져갔다. 그러다 멈추더니, 결국 다시 소파에 던져놓았다.
손이 서랍 쪽으로 갔다가 방향을 틀어 머리카락 사이를 훑었다. 서랍 속 지폐 뭉치의 존재가 피부 밑에서 가시처럼 욱신거렸다.
거울 앞에 섰다. 셔츠 윗단추가 풀려 있었고, 귀의 은색 피어싱이 창가 빛을 받아 한 점 반짝였다. 이 얼굴로 몇 명의 밤을 열었고, 몇 명의 아침을 닫았던가. 숫자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 모든 장면들이 지금은 빛바랜 필름처럼 느껴졌다.
인터폰이 울렸다.
덱스터의 어깨가 아주 약간,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했다. 그리고 그 긴장을 삼키듯 목을 한 번 꺾고는 느릿한 걸음으로 현관을 향했다. 문을 여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건, 열기 싫어서가 아니라 열고 싶어서였다. 그 구별을 자기 자신에게 설명할 언어를 이 남자는 아직 갖고 있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복도의 형광등 아래 서 있는 유저의 얼굴이 보였다.
덱스터의 시선이 그 얼굴 위를 한 바퀴 돌았다. 눈, 코, 입술.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 지난번 헤어진 뒤 며칠 만인데, 그 며칠이 턱없이 길었다는 사실이 뱃속 어딘가를 불편하게 건드렸다.
그는 문틀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 팔짱을 꼈다. 익숙한 자세, 익숙한 각도. 오만함이 가장 잘 어울리는 포즈.
"Took you long enough. I was about to start charging rent for the wait.
(꽤 오래 걸렸네. 대기료 받을 뻔했어.)"
목소리는 나른했다. 늘 그렇듯이. 하지만 문을 열어주는 손이 평소보다 조금 더 넓게 공간을 만들었고, 유저가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 그의 시선은 단 한 순간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닫히는 문 너머로 복도의 빛이 사라졌다.
펜트하우스 안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만 남았다.
핸드폰 화면에 뜬 메시지를 내려다보던 덱스터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가슴속 어딘가가 또 그 묘한 방식으로 조여들었다. 짜증이 올라오는 것 같으면서도 아니었다.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역겨울 정도로 낯선 감정.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맴돌았다. '그래, 기다릴게' 같은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핸드폰을 소파 쿠션 위로 내팽개쳤다.
펜트하우스는 깨끗했다. 평소라면 술병이나 빈 피자 상자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을 법한데, 언제부턴가 유저가 오기 전날이면 청소를 맡기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각하는 순간 씁쓸한 웃음이 났다.
"Pathetic.
(한심하네.)"
혼잣말이 거실에 퍼졌다.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천장의 조명이 눈부시게 박혀 있었다.
서랍 속 지폐 뭉치가 또 머릿속을 스쳤다. 천 달러. 내기. 2주. 이제 두 달이 훌쩍 지났는데도 그 돈은 여전히 거기 있었고, 잭은 매번 비아냥거렸고, 자신은 매번 대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초인종이 울릴 시간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덱스터는 소파 쿠션 너머로 손을 뻗어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가, 이내 화면을 켜지 않고 옆구리에 끼워 넣었다. 눈을 감았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유저의 얼굴이 떠올랐다. 웃을 때 살짝 처지는 눈꼬리. 자신을 올려다볼 때의, 그 묘하게 믿음 같은 게 어린 시선.
"Shit.
(젠장.)"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진동 한 번. 덱스터는 현관 쪽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손안의 핸드폰 화면이 짧게 밝아졌다가, 그의 눈동자에 푸른빛처럼 번졌다. 유저의 문자였다. 단정하지도, 계산적이지도 않은 짧은 한 줄. 그는 그 한 줄을 금방 읽고도 바로 답하지 못했다. 엄지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맴돌았다. 입꼬리는 습관처럼 조금 올라갔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늦었다. 마치 얼굴이 먼저 외운 표정을 이제야 따라 붙이는 것 같았다.
펜트하우스 안은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바 테이블 위에는 반쯤 비운 물잔 하나, 소파 팔걸이엔 아무렇게나 벗어둔 검은 가죽 재킷, 스피커에서는 아주 낮은 볼륨으로 재즈가 흘렀다. 트럼펫 소리가 유리창에 부딪혀 흐려졌고, 뉴헤이븐 초가을의 저녁 공기는 통유리 바깥에서 점점 푸른 기색을 짙게 하고 있었다. 멀리 캠퍼스 종탑이 여섯 시를 알리기 직전의 정적을 머금고 있었다. 아래 도로에는 학생들 몇이 어깨를 웅크린 채 지나가고, 스포츠카 한 대가 짧게 가속음을 남기며 꺾여 나갔다.
덱스터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 아래까지 걷어 올린 채, 주방 아일랜드 모서리에 기대 섰다.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고, 손가락 끝이 조용히 대리석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참을성 없는 사람의 박자였다. 그는 결국 짧게 답장을 보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나서도 화면을 한참 내려다봤다. 그 짧은 문장에 괜히 날이 서 있는 것 같아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지우고 다시 보낼까 싶다가, 그는 낮게 혀를 찼다. 이미 늦었다는 듯 핸드폰을 뒤집어 바 테이블 위에 던져두고 냉장고를 열었다. 안쪽에서 차가운 공기와 함께 레몬 껍질, 탄산수, 남겨둔 타이 음식 냄새가 스쳤다. 그는 병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술은 아니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평소처럼 유리잔에 무언가를 따르는 동작조차 방패처럼 느껴졌다.
현관 거울 앞에 선 그는 잠깐 자기 모습을 훑었다. 헝클어진 금발 사이로 이마가 반쯤 드러나 있었고, 셔츠 윗단추 두 개는 풀려 있었다. 단정해 보이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조금 전보다 덜 초조해 보이고 싶었다.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던 동작이 중간에 멈췄다. 턱선이 굳었고, 아랫입술이 이빨 사이에 잠깐 물렸다가 놓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소리가 복도 저편에서 희미하게 울렸다. 기계음은 두꺼운 카펫과 벽을 통과하며 무뎌졌지만, 그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또렷했다. 그는 문에서 너무 가까운 자리도, 너무 멀리 떨어진 자리도 아닌 곳에 섰다. 소파 옆, 불빛과 그림자가 반씩 걸치는 지점. 팔짱을 끼려다 그만두고,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잠금장치 쪽의 미세한 전자음이 정적을 갈랐다. 덱스터의 시선이 곧게 들렸다. 눈빛은 늘 그렇듯 느긋한 척 부드러웠지만, 목 아래에서는 맥박이 셔츠깃 안쪽에서 빠르게 뛰고 있었다.
"Hey.
(왔네.)"
펜트하우스 현관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바깥세상의 소음과, 그보다 더 지긋지긋한 잭의 목소리가 완전히 차단된 공간. 덱스터는 등을 문에 기댄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등을 타고 오르며 들끓는 속을 겨우 진정시키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제발, 단 10분이라도 좋으니 이 지옥 같은 생각의 셔터를 내리고 싶었다.
그 순간, 자켓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징- 하는 그 미세한 울림이 고요한 현관 전체를 뒤흔드는 것처럼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덱스터는 거의 반사적으로,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 위로 떠오른 유저의 이름과 그 뒤에 붙은 발랄한 느낌표. 그 몇 글자를 응시하는 덱스터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헤집던 잭의 비웃음과 구겨진 지폐의 잔상이, 마치 강한 빛에 사라지는 악몽처럼 순식간에 밀려났다. 그 자리엔 오직 유저가 온다는 사실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젠장, 벌써.'
그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예상보다 빠른 도착. 혼자서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완전히 박탈당했다는 초조함과, 동시에 이 지독한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독처럼 뒤섞여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잠시 아무런 답장도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 서서 화면만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이내 덱스터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여유롭고 능글맞은 연인인 척. 가면을 쓰는 것은 그의 오랜 특기였으니까.
문자를 보낸 그는 거실로 향하며 입고 있던 가죽 자켓을 아무렇게나 소파 위로 던져버렸다. 어지럽게 널린 쿠션, 마시다 만 위스키가 담긴 잔.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풍경이 오늘따라 유독 거슬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침실로 향하는 복도 끝에 있는 작은 그림 액자를 무심코 비뚤어지지 않았는지 고쳐 걸었다. 마치 흐트러진 제 마음을 바로잡으려는 것처럼.
다시 거실로 나온 그는 위스키 잔을 들고 키친 아일랜드로 향했다.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털어 넣자, 타는 듯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며 신경을 억지로 마비시키는 듯했다. 텅 빈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대리석 상판 위에서 유난히 차갑게 울렸다. 덱스터는 창밖으로 펼쳐진 뉴헤이븐의 전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곧 저 도시의 어딘가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유저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을 터였다.
'젠장할 내기.'
결국 다시 원점이었다.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 그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 이내 모든 생각을 지워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생수병을 꺼냈다. 유저가 오면 늘 물부터 찾았으니까. 그 사소한 습관을 챙기는 자신의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기만으로 시작된 관계 속에서, 이런 작은 진심들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고요한 펜트하우스 안으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나직한 소음이 울렸다. 덱스터는 잭과의 대화에서 비롯된 지독한 불쾌감을 떨쳐내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오만하고 여유로운 가면 뒤에 숨은, 혼란에 빠진 남자의 얼굴. 그는 거칠게 머리를 한번 헝클어뜨리며 익숙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애썼다. 바로 그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짧게 진동하며 유저의 메시지를 알렸다.
그 글자들에는 조금의 의심도, 그늘도 없었다. 자신을 향한 순수한 기대감. 덱스터는 저도 모르게 숨을 잠시 멈췄다. 펜트하우스 서랍 깊숙한 곳에 잠든 천 달러짜리 지폐의 감촉이 환영처럼 손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그는 잘게 씹고 있던 아랫입술을 놓고,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나른한 미소를 만들었다. 그래,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That's my girl. Always so eager.
(그거 참 내 여자친구답네. 언제나 이렇게 성급하다니까.)"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보란 듯이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일부러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를 연기하며 핸드폰에 대고 음성 메시지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죄책감을 잊게 할 만큼,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Already on your way? Someone's impatient. Did you miss me that much?
(벌써 오는 중이라고? 누가 보면 엄청 급한 줄 알겠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녹음 버튼에서 손가락을 뗀 그의 얼굴 위로 다시금 복잡한 그림자가 스쳤다. 그는 서둘러 타이핑을 이어갔다. 평소처럼, 유저를 놀려먹는 게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는 듯이.
전송 버튼을 누른 덱스터는 핸드폰을 소파 위로 던져버렸다.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도시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의 시선은 그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허공을 방황했다. 어서 유저가 와서, 이 엉망인 자신을 그녀의 존재로 전부 덮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는 간절히 바랐다.
엘리베이터가 부드러운 기계음을 내며 펜트하우스 층에 멈춰 섰다. 대리석 바닥 위로 구두 굽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핸드폰 화면에 뜬 유저의 문자를 확인한 순간, 방금 전 잭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거칠어졌던 호흡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그는 화면 속 활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내렸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잠시 서 있던 그는, 이내 손가락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긴 숨을 토해냈다. 묘한 안도감과 동시에, 속을 긁어내는 듯한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다시금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Fuck, you're driving me crazy.
(씨발, 사람 미치게 하네 진짜.)"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평소의 여유로운 오만함 대신 짙은 피로감과 통제되지 않는 감정의 잔해들이 묻어났다. 거실로 들어선 그는 고급 가죽 소파 위에 재킷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공간에 배어 있는 익숙한 자신의 시가 향과 니치 향수 냄새가 오늘따라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침실 쪽, 정확히는 침대 옆 협탁의 굳게 닫힌 맨 아래 칸 서랍으로 향했다. 그 안에 처박혀 있을, 구겨진 천 달러 지폐와 잭의 휘갈긴 메모. 그 망할 종이 쪼가리들이 마치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아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주방 아일랜드 식탁으로 다가간 그는 크리스탈 글라스에 차가운 물을 거칠게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얼음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적막한 펜트하우스 안을 갈랐다. 유저가 곧 도착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 무해하고 다정한 얼굴을 하고서.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카드키 인식음에 덱스터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찰나의 순간,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굳은 표정을 지워내고 평소의 나른하고 능글맞은 미소를 입가에 덧그렸다.
"Look who's early.
(일찍도 오셨네.)"
그는 빈 글라스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천천히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셔츠 단추 두어 개가 여전히 풀어헤쳐진 채였고, 깊고 짙은 푸른색 눈동자는 다가오는 발소리를 향해 집요하게 고정되어 있었다.